그냥 걸었던 시간
[사진 에세이]
걷는 일이 그 자체로 즐겁진 않을 때였다.
걷는 건 목적 혹은 목적지가 있어야 했고, 이동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중요했고, 내 마음보다 걷기 위한 컨디션을 체크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걷는 게 좋다. 걷기 위해서 걷는 거지. 목적지? 정하지 않아도 되고, 정한 들 마땅찮으면 중간에 돌아온들 어떤가.
생각의 전환을 이룬 게 2010년의 제주였다. 저가항공사들이 줄지어 생기면서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오는 게 가능해진 게 저 즈음이었다. 당일로 제주 올레를 걸을 수 있게 된 거지.
거의 매주 제주를 다니며 올레를 걷는 지인을 따라 동행했다. 아마도 16코스를 걸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사진 속 장소는 수산저수지고 항몽유적지도 걸었던 걸로 미루어 16코스가 맞다.
당일로 올라온 건 아니어서 팀과 조인해서 올레를 걷고 이튿날 낚시도 하고 게스트하우스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잤다. 팀이 서울로 올라간 후 나를 제주로 인도한 형과 함께 중산간을 돌아다녔다. 남서쪽 모구리오름 근처 모구리 야영장에서 보낸 시간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저 때 올레를 걸으면서 찍은 사진 중에 기억에 남는 사진이 세 장이다.
검은 현무암과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사진. 세로 프레임이었는데, 현무암은 밑에 살짝 걸쳐 있었고 풍경의 8할 이상이 바다였다. 하얀 백파(白波)가 간간이 보이는 바다.
또 한 장은 어느 작은 마을 어귀에서 쉴 때 찍었다. 양지바른 풀밭에서 할머니 한 분이 뭘 캐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사연을 여쭈니, 사투리로 말씀하시는데, 발음을 적어 제주 출신의 아는 형님께 물으니 딸이 아파 달여 먹일 약초를 캔다는 뜻이었다고. 그 어르신, 그 어르신이 정성을 들이시던 그 따님, 이승과 저승, 어느 쪽에 계실는지.
나머지 한 장은 이 사진이다. 앞선 일행이 수산저수지 둑을 걷고 있었고 뒤에 가던 나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너른 자연에 안긴 사람의 모습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올해 가을에 제주도를 찾을 예정이다. 자전거를 좀 탈 예정이고 걷는 것도 빠뜨리지 않을 거다. 다만 올레보다는 한라산 둘레길을 걷고 싶다. 이때 같이 걸었던 누구도 같이 걷긴 힘들겠지만, 모두에게 다시 제주의 시간이, 걷고 웃고 떠들던 즐거움의 시간이 다시 주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