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가 났네
[사진 에세이]
그런 순간이 있다. 낯선 세계를 날 것으로 만나 나의 세계가 변화하는.
변화는 때로 깨지는 것으로 때로는 깊어지는 것으로 또 어떤 때는 낯선 세계로 안내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난다.
겨울이라 봄동을 찾아 떠난 길이었다. 새벽에 진도와 해남을 돌며 일하시는 분들을 버스로 태워 밭으로 오신다 하여 시간을 맞춰 갔다. 아직 도착하시기 전인데, 해가 솟으니 봄동이 꽃처럼 빛나더라. 그 순간만으로도 나의 여행은 이미 충분했다. 그러나.
새벽 꽃잠 베개에 묻어두고 일하러 나온 아낙들은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나이로는 할머니가 맞겠으나 그 입담과 센스, 흥과 발랄함은 아낙이란 말이 맞겠다. 마치 고된 노동을 하러 새벽부터 나온 게 아니라, 새벽에 잠이 깼는데 같이 놀 친구를 찾아 나온 것 같았다.
아침 새참에 소주가 한두 바퀴 돌았고, 봄동 상자들이 차 갈 무렵, '네 노래 안 들으면 낫이 나아가질 않는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걸죽하게 튀어나왔고 이내 한 아낙이 낫 놓고 일어나 헛기침 두어 번 하더니 소리를 뽑아낸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원래는 빈 상자 북 삼아 낫자루로 장단 맞추는 고수 역할 아낙도 있지만 감기 기운 때문에 이날은 나오지 못하셨다고.
언젠가 지리산 자락 막걸리집에서 함께 간 이가 주인에게 소리를 청한 적이 있었다. 여주인의 답은 거절이었다. 싸가지 없이 막걸리 한 잔 안 주면서 노래를 청하느냐고. 소리 들을 자격 없다고. 술잔이 오갔다. 낯선 손님이었던 나에게 듣고 싶은 곡을 물었다. 내가 뭘 알겠는가만, 어려서 아버지 따라 전주대사습놀이를 몇 번 따라다닌 기억에 남은 제목이 떠올랐다. '쑥대머리'.
남원의 아낙도 해남의 아낙도 누구를 사사하거나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다 하셨다. 다만 자라면서 늘 듣던 가락이 몸에 밴 건지 판소리와 국악에 대한, 혹은 음악에 대한 나의 어떤 생각들이 산산조각 났다. 피를 토하는 쑥대머리에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았고, 내키는 대로 꺾는 진도아리랑에 몸이 둠칫둠칫 했다. 텔리비전이나 라디오 속 박동진 안숙선보다 눈앞의 아낙이 몇 만 배 낫다.
수첩을 보니 박서애 할머니로 적어두었다. 살아계신지, 건강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