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꼴 1_자전거를 탈 거야, 꽃을 볼 거야

2023. 6. 1. 07:00여행의 아무런 나날

2016년. 오키나와. 사진 김해진.

[여행 중입니다]

 

 

 

시작은 레분이었다. 홋카이도 북서쪽 끄트머리의 작은 섬.

 

일단 홋카이도에 가야 한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내리면 레분섬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북쪽 끝의 도시 왓카나이에 가야 한다. 직선거리로 약 295킬로미터, 실제 가는 길로 치면 360킬로미터 정도다. 그래 자전거를 타고 가면 되겠군. 며칠 걸리겠지? 잠은 바다와 밤하늘을 보면서 자겠어. 캠핑을 할 거야.

 

리시리섬과 레분섬을 충분히 돌아보고 다시 나오면 삿포로를 향해 달리는 거야. 역시 자전거를 말이지. 삿포로에 잡은 숙소에 자전거를 두고 시내 관광을 며칠 하거나 모터사이클을 빌려 자전거로 달렸던 길을 쓱 훑고 오거나 섬의 동쪽 지역을 살펴봐야지.

 

처음에 생각한 일정은 열흘 정도였다. 모터사이클을 예약하려는데 원했던 혼다 헌터커브가 없다. 못 찾은 걸지도. 헌터커브를 탈 수 없다면 안 타겠어, 모터사이클 일정을 뺐다. 그래도 날짜가 모자라 2주 넘는 기간으로 늘렸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다 우겨 넣으려 하니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줄여야 한다. 더 줄여야 한다. 그래서 물었다, 스스로에게.

 

'이번 홋카이도가 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뭐 할래?'

 

망설일 필요 없이 자전거였다. 끝없는 바다를 곁에 두고 자전거를 타는 건 고래가 되는 경험이었다. 오키나와에서 느꼈다.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순 없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홋카이도의 해변 도로는 그런 시도에 더없이 좋을 거다.

 

'좋아. 하루 더 시간이 주어지면 뭐 할 건데? 자전거 빼고."

 

뭘 물어, 레분섬 가서 꽃 봐야지. 이 여행이 거기서 시작됐는데.

 

'좋아, 그럼 그거 두 개만 원 없이 하자. 다른 건 버리자. 여비일을 두고, 시간이 남으면 나머지를 생각하자.'

 

한 달 가까이 일하다 생각하고, 자러 누워서 생각하고, 똥 누면서 생각하고, 야구 보다가 생각하고 해서 여행의 테마를 간단하게 줄였다. 그게 저 제목이다. '자전거를 탈 거야, 꽃을 볼 거야.'

 

자전거를 달려 섬의 북쪽에 도착해 배를 타고 리시리섬에 들어가 자전거로 리시리섬을 일주하고 레분섬으로 옮겨 야생화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실컷 볼 거다. 리시리와 레분의 순서는 바뀔 수 있다. 그러고는 배를 타고 본섬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요컨대, 닷새 달리고 닷새 동안 두 섬을 보고 닷새를 달려 돌아와 이틀 정도 쉬거니 놀거니 하는 게 대략의 일정이다.

남는 시간에는 기차로 토막 여행을 하거나 삿포로 시내를 보거나 시장을 둘러보거나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잠깐은 유명한 로스터리 카페를 찾아볼 거고, 프로야구 한 경기 정도 볼 수 있으면 볼 거다. 그게 다다.

 

더 이상 넣을 수 없는 계획이 아니라 더 이상 뺄 수 없는 계획이다. 자전거와 꽃만 제대로 되면 시내 관광 못 해도 된다, 생각한다. 덕지덕지 계획을 떼고 나면 비행기 시간만 맞추면 되니 꽃을 더 볼 수도, 자전거를 더 탈 수도 있는 노릇이다. 건물을 짓다가 부수고 얼개만 남긴 느낌이다.

 

글은 첫 문장을 시작하면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이끈다. 시작하기 전엔 생각하지 못 한 문장을. 여행도 그렇지 않을까? 여행의 어떤 순간이 어떤 경험이 어떤 만남이 다음 순간과 경험을 지어 여행을 이어나가지 않을까. 계획할 땐 상상도 못한 여행을.

 

우연 혹은 기적 같은 여행의 순간은 최고의 선물이다. 거기에 기대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