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에세이(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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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좋은 시절
[사진 에세이] 오랜 친구들과 공작산 숲을 잠시 걸었다. 산을 올랐다기엔 언저리를 서성였고, "오늘 좀 걸었다"기엔 가벼운 산책이었다. 두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숲으로 난 길을 걷고, 바람이 좋은 곳에서 잠시 쉬었고, 물이 좋은 곳에서 잠시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잠시 쉬었고, 그러다 또 잠시 걷곤 했다. 아주 귀한 나무가 있는 숲은 아니고 그 풍광이 사무칠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 또한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숲이었다. 충분히 좋았다. 하늘은 맑았고 숲은 간간히 볕이 들었다. 숲은 신록에서 벗어나 녹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에 비하면 청년기랄까. 산골짜기에서 간혹 바람이 불었고, 나무들은 저마다의 리듬으로 바람의 박자를 탔다. 바늘잎, 넓은잎, 작은 잎, 큰 잎, 나무 꼭대기..
2023.06.05 -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사진 에세이] 처음 간 뉴욕, 맨해튼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첫 번째였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색일 땐 주변을 잘 살피고 건넌다. 그냥 건넌다. 금세 적응했다. 며칠 만에 뉴요커처럼 무단횡단을 하려는데 옆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들이 차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멈칫,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경찰도 자연스러웠다. '차가 오면 위험하니 건너지 마란 뜻이야. 지금은 차가 안 오잖아. 도시는 사람이 걸을 수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거지. 두 번째는 무관심.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 피해에는 기분이 나쁜 건 포함되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2023.06.03 -
짜디짠 인생
[사진 에세이] "굴 한 점 잡솨볼 텨?" 겨울이면 굴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떠올리는 편이다. 여행지를 찾다가 굴 캐는 걸 보고 싶었다. 남해의 크고 하얀 양식 굴 말고, 서해의 작고 노리끼리한 자연산 굴. 자연산이라서가 아니라 노동이 더 고될 것이라서. 몰랐다. 그리 새벽에 나가시는 줄. 간 날 점심으로 굴국밥을 먹고 식당 주인께 여쭈니 새벽에 나가셔서 아침이면 들어오신다고. 피곤하지만 물때가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서산에서 멀지 않은 전주집으로 갔다.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새벽에 가야 하니 소리가 나도 신경 쓰지 마시라 했다. 전화기 알람이 울려 깨니 부엌이 환하다. 새벽부터 일하시는 할머니들 만나는데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라고. 보온병에 마죽이 한가득이다.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짙푸른 어둠 속에서..
2023.05.30 -
젖무덤
[사진 에세이] 앞에 소개한 '빗방울로 쌓은 탑'을 보기 전날 밤, 대릉원. 숙소가 대릉원 앞이었고, 저녁을 먹고 들어와 쉬려다 밤의 대릉원이 궁금하여 카메라만 들고 나갔다. 낮보단 적었지만 사람이 제법 있었고, 인적 없는 고요함을 기대했었기에 한 번 둘러보고 나가려 했다. 낮의 일정이 빡빡했었는지 피곤해서 잠시 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대릉원 문을 닫는 시간이 10시였던가, 그랬는데 한 30분 정도 남았기에 한 바퀴 더 돌고 가려고 일어섰다. 두어 번 정도 모퉁이를 돌았을까. 엄마의 젖가슴 같은 무덤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편안하고 그리고 안전한 엄마의 젖가슴. 어렸을 땐 몰랐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었을 때 얼마나 편안해하고..
2023.05.28 -
빗방울로 쌓은 탑
[사진 에세이] 출장이었지만 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경주에 있는 전통시장을 취해하는 일이었고, 나는 시장도 좋아하고 경주도 좋아한다. 특히 경주의 박물관. 일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고 숙소를 잡아 하루를 더 묵었고, 밤엔 대릉원을 걸었고 이튿날 낮엔 박물관에서 내내 머물렀다. 서너 번을 돌아본 뒤 땀에 젖어 밖에서 탑을 보면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후다닥 건물 안으로 혹은 처마 밑으로 피했고, 나는 가만 있었다. 뛸 기운도 없었고, 이미 땀에 젖은 뒤였다. 사위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뜰에 가득했던 소리들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고, 듣다 보니 젖어가는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빗방울이 쌓아올린 다보탑이 눈에 들어왔다. ..
2023.05.28 -
전쟁과 평화
[사진 에세이] 좀 오래 전, 통영이었다. 좋아서 혹은 일이 있어서 거의 계절에 한 번씩 통영을 찾던 때가 있었다. 한... 몇 년 정도. 산도 보고 바다도 보고, 세병관이 좋아서 하릴없이 거닐며 머물러도 보고 중앙시장의 번잡함이 좋아 회 떠주시는 할머니들과 수다도 떨고. 아마도 일로 갔을 때다. 여행기이니 여행을 하면 되지만, 대개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사항이 있기 마련이어서 돌아보는 곳이 정해져 있다. 가야할 곳을 다 본 다음에 아무런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통영운하 근처였나 힘들어서 잠깐 쉬는데 볕 좋은 곳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풍경이 좋다고 이방인이 개입하면 전투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법, 멀찌감치에서 풍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몇 장 찍었다. 장기를 잘 몰라 어느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
2023.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