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2023. 6. 3. 07:00여행의 순간

2019년. 맨해튼. 뉴욕, 미국.

[사진 에세이]

 

 

 

처음 간 뉴욕, 맨해튼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첫 번째였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색일 땐 주변을 잘 살피고 건넌다. 그냥 건넌다. 금세 적응했다. 며칠 만에 뉴요커처럼 무단횡단을 하려는데 옆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들이 차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멈칫,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경찰도 자연스러웠다. '차가 오면 위험하니 건너지 마란 뜻이야. 지금은 차가 안 오잖아. 도시는 사람이 걸을 수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거지.

 

두 번째는 무관심.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 피해에는 기분이 나쁜 건 포함되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속바지 같은 레깅스에 나시를 입고 위에 헐렁한 재킷을 걸친 여성이 헤드폰을 끼고 출근을 하는데, 거리의 표정은 평화로웠고 온도는 1도도 변하지 않았다. 간혹 '멋진데?' 하는 눈길을 던지는 젊은 여성들이 있긴 했다. 공중도덕이나 공공장소의 예절을 떠올리는 이도 없는 듯했다.

 

세 번째가 철계단이었다. 오래된 건물 외벽에 그야말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철계단. 비상시에 탈출용으로 만들었겠지. 그러다 센트럴파크 앞에 아마존 서점이 있어서 들어갔다가 뉴욕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발견했다. 19세기의 이민자들은 테너먼트tenement에서 살았는데, 환경은 열악했을 테고 안전시설도 의식도 없었을 테니 불이라도 나면 그대로 몰살이었다. 또 방직공장들이 있던 로프트loft는 시대가 바뀌면서 공장들이 문들 닫고 사라져 빈 건물로 남았다가 예술가들의 주거시설이 되었다. 사고에 취약하기는 로프트도 마찬가지. 원자재나 제품을 나르기 위한 화물 엘리베이터는 있지만 비상계단은 없었으니까.

 

사고가 반복되자 1927년 시는 비상계단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했다. 구조를 바꾸긴 어려우니 밖에다 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 계단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다. 물론 나중엔 건축 기술이 좋아지면서 외부가 아닌 내부에 비상계단을 만들고 방화문으로 불을 막을 수 있게 되어 외부의 철계단은 더이상 설치하지 않았다. 1968년에는 외부에 계단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계단 달린 건물은 1968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인 셈이다.

 

그 와중에 도둑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철계단은 2층까지만 내려온다. 그럼 뛰라고? 아니지, 사다리가 매달려 있어 사람의 무게가 실리면 2층에 매달린 사다리가 내려와 철계단 난간에서 1층을 잇는다. 물론 브루스 윌리스는 뛰어내렸지만.

 

애써 새 것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냅두는구나. 쿨한 걸? 쓰임새는 딱히 없지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 두어 도시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린다.

 

네 번째 놀란 건 뉴욕을 떠나던 날 오후에 봤다. 소호 거리에 오래된 로프트가 많아 다양한 철계단을 보게 되었는데 계단을 따라 멋진 조각을 해둔 로프트를 봤다. 마치 지붕 끄트머리 막새기와에 사람 미소를 새기듯, 건물에 조각을 해두었다. 심플한 걸 좋아해 어지간하면 거추장스러웠을 테고 대개는 '유난스럽기는' 하고 지나쳤을 텐데, 씨익 웃고 말았다.

 

말해 뭐 해. 봐야지.

2019년, 맨해튼. 뉴욕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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