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던 시간

2023. 6. 1. 14:36여행의 순간

2010년 6월. 수산저수지. 제주.

[사진 에세이]

 

 

 

걷는 일이 그 자체로 즐겁진 않을 때였다.

 

걷는 건 목적 혹은 목적지가 있어야 했고, 이동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중요했고, 내 마음보다 걷기 위한 컨디션을 체크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걷는 게 좋다. 걷기 위해서 걷는 거지. 목적지? 정하지 않아도 되고, 정한 들 마땅찮으면 중간에 돌아온들 어떤가.

 

생각의 전환을 이룬 게 2010년의 제주였다. 저가항공사들이 줄지어 생기면서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오는 게 가능해진 게 저 즈음이었다. 당일로 제주 올레를 걸을 수 있게 된 거지.

 

거의 매주 제주를 다니며 올레를 걷는 지인을 따라 동행했다. 아마도 16코스를 걸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사진 속 장소는 수산저수지고 항몽유적지도 걸었던 걸로 미루어 16코스가 맞다.

 

당일로 올라온 건 아니어서 팀과 조인해서 올레를 걷고 이튿날 낚시도 하고 게스트하우스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잤다. 팀이 서울로 올라간 후 나를 제주로 인도한 형과 함께 중산간을 돌아다녔다. 남서쪽 모구리오름 근처 모구리 야영장에서 보낸 시간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저 때 올레를 걸으면서 찍은 사진 중에 기억에 남는 사진이 세 장이다.

 

검은 현무암과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사진. 세로 프레임이었는데, 현무암은 밑에 살짝 걸쳐 있었고 풍경의 8할 이상이 바다였다. 하얀 백파(白波)가 간간이 보이는 바다. 

 

또 한 장은 어느 작은 마을 어귀에서 쉴 때 찍었다. 양지바른 풀밭에서 할머니 한 분이 뭘 캐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사연을 여쭈니, 사투리로 말씀하시는데, 발음을 적어 제주 출신의 아는 형님께 물으니 딸이 아파 달여 먹일 약초를 캔다는 뜻이었다고. 그 어르신, 그 어르신이 정성을 들이시던 그 따님, 이승과 저승, 어느 쪽에 계실는지.

 

나머지 한 장은 이 사진이다. 앞선 일행이 수산저수지 둑을 걷고 있었고 뒤에 가던 나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너른 자연에 안긴 사람의 모습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올해 가을에 제주도를 찾을 예정이다. 자전거를 좀 탈 예정이고 걷는 것도 빠뜨리지 않을 거다. 다만 올레보다는 한라산 둘레길을 걷고 싶다. 이때 같이 걸었던 누구도 같이 걷긴 힘들겠지만, 모두에게 다시 제주의 시간이, 걷고 웃고 떠들던 즐거움의 시간이 다시 주어지길.

'여행의 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0) 2023.06.03
아라리가 났네  (2) 2023.06.02
새벽의 녹차밭  (0) 2023.05.31
짜디짠 인생  (0) 2023.05.30
젖무덤  (0) 2023.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