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작업실.

2023. 10. 12. 14:01시시껄렁한 이야기_閑談

내 일이라는 게, 추리고 추려보니 이 세 개가 남았다.

[작업실 일기]

 

다시 작업실을 마련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 급하면 얼른 집으로 갈 수 있는 곳, 거꾸로 두어 시간 이야기를 적기 위해서 잠시 들를 수 있는 곳. 두세 번의 민망한 실패에도 다시 작업실을 꾸린 건, 이대로 접고 물러날 수 없어서가 반, 하고픈 이야기들이 조금 차올라서가 반이다. 아마 그 틈바구니 어디에 나만의 공간, 더불어 시간도 필요해서가 조금 있을 거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어쨌든 기록을 남기고 이야기를 지어보자 다짐했고 그럴 공간이 필요했다.

 

지난봄부터 이따금씩 알아보다가 여름 지나면서 몇 곳으로 후보지를 줄였고, 추석이 지나면 좀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싶어 추석을 앞두고 계약을 하고 짐을 옮겼다. 그로부터 대략 보름이 지나 이제야 뭔가를 시작했다. 우이동에서 가져온 짐은 하얗고 검은곰팡이가 곳곳에 있었고 보이는 족족 닦아내도 그 눅눅한 냄새 혹은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냄새를 이야기한 건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창문을 닫은 적이 없는데 아직도 나는 그 냄새가 느껴진다. 그 습한 곳에서 2년 가까이 있었으니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한다.

 

정리가 끝나진 않았다. 아직은 좀 너저분하지만 일단 일하는 공간만 정돈을 마쳤다. 지내면서 꼭 필요한 부분들은 조금씩 보탤 예정이다.

 

작업실이 생기면서 새로운 주소지가 주어졌고, 아직은 남루하지만 홈페이지에도 글을 차곡차곡 쌓을 예정이니 명함이 필요했다.

 

우선 앞면. 나는 뭐하는 사람이지? 내가 하는 일을 추려보니 여러 가지가 남았는데 다 적어봤다가 요란한 깡통 느낌이라 다 발라내고 세 개만 남겼다. 여행하는 일과 읽는 일은 세상을 배우는 과정이고 쓰는 건 내가 일군 세계를 표현하고 나누는 과정이다. 대단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게 아니라 어떻든 간에 살면서 여행하면서 이룬 세계를 적어둔다는 뜻이다. '여행은 떠돌면서 읽는 것이고,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는 말처럼.

 

뒷면.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니, 어떤 글을 쓰는지 알 수 있는 홈페이지를 제일 크게 넣었다. kaleidoscope, 칼레이도스코프는 만화경이다. 간단한 무늬지만 거울을 통해 재미난 모양새와 움직임을 보여준다. 어쩌면, 세상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에는 여러 내용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나에겐 '여행을 하다 보면'이 제일 그럴듯하다. 처음 보면 읽기가 힘들어 두 줄로 나누었다. 이름은 최대한 작게 대신 조금 진하게. 이런저런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과 나눌 것이나 영문 표기도 함께. 전화번호 앞에는 082를 붙이고. 이메일은 오래전 만들었던 구글 메일을 살렸다. 자갈을 뜻하는 koram은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에서 가져왔는데 이미 사용 중이라 도로 번호인 35번을 붙였다. 주소는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쩌겠나. 너무 길고 외국어가 범벅이다. 이전 주소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재두루미길이란 길 이름도 딱 떨어지는 두 자리 번지수도. 

 

주소가 틀렸다. 김포한강10로다. 3로가 아니라. 실제 명함엔 교정부호로 고쳐서 건넬 거다.

 

나는 어쩌다가 세상만물을 일구어내는 노동자가 되지 못하고 글이나 끄적거리는 신세가 되었는가. 집필노동자라기엔 공치는 날이 너무 많아 부끄럽다. 그렇다고 '주어진 길'이라 하기에도 길에서 벗어나 열심히 잘 사는 이들이 많아 민망하다.

 

그래서 생각한다. '작가'라는 말 민망해하지만 말고 작가가 되자. 수준은 부끄러워도 스스로에겐 떳떳한 글을 쓰자, 꾸준하게. 그것이 작업실에서 날마다 되새기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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