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멍

2023. 5. 5. 08:30캠핑의 물건들

 

덕노트 화로대, DUCKNOT B.S.T

 
[불놀이의 물건] 

 

 

내게 캠핑의 즐거움을 다시 일깨운, 고마운 화로대다.
 
언제부턴가 나의 캠핑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많은 짐을 챙겨 옮기고 펼치는 데 힘을 쏟고 하룻밤 보낸 뒤 다시 거두어 정리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계절이 시나브로 바뀌어가는 걸 본다든가, 긴 여행 도중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텐트를 펼치는 것을 생각하다가 떠난 1박 캠핑은 너무 밋밋하고 동시에 너무 성가셨다.
 
불놀이도 마찬가지. 불멍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화로대를 피울 수 없는 곳이 아니라면 화로대를 펴고 불을 피운다. 오랜 스테디셀러인 역사각뿔 모양의 화로대가 있는데 어지간히 많이 쓰기도 했다. 역사각뿔형 화로대의 원조는 스노우피크지만 내가 가진 건 우연한 경로로 내게 온 코베아의 카피품이다. 형태의 탄생은 지면에 전달되는 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는데, 카피한 제품이라도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불만 없이 잘 썼다.
 
언젠가부터 화로대가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미니멀한 컵 모양의 초미니 화로대는 본 역할도 열원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무거운 줄 모르고 즐겨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로대를 챙겨 가고 챙겨 오는 일이 번거롭고 부담스러워졌다. 사용 후 정리하고 씻는 작업은 별도로 하더라도. 장작불을 요리의 열원으로 사용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장작을 매번 챙기는 일도 번거로워 화로대는 꼭 필요할 때만 챙기는 아이템이 되어 나의 캠핑에서 조금 멀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코베아의 화로대가 멀어진 것이지, 불멍이 멀어진 건 아니었다.
 
화로대에 대한 갈증이 어느 순간부터 일었고, 미국과 일본의 아마존을 뒤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튼튼한 장비로 커다란 불을 즐겼고, 일본은 작고 가벼운 화로대에 작은 불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일본의 쇼핑몰들을 뒤졌고, 세 개 정도의 최종 후보를 두고 한참 고민했다. 장바구니에서 썩기 전에 사서 내 품에 안긴 것이 덕노트의 화로대 세트다. 값은 배송비까지 대략 16만 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지금(2023년 5월 4일) 보니 ¥14,850인 걸 보니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아하, 그 사이 '굿 디자인 상'을 지난해 받았네. 그럴 만 해.
 
 

 

위와 옆에서 본 모습. 시중에서 파는 장작을 편하게 쓸 수 있다. 장작 서너 개로도 불멍을 즐길 수 있다는 건 꽤 큰 매력이다.
장작을 추가할 때 빨리 붙이고 싶으면 화로대에 걸친 받침대에 올리면 된다. 평소에는 코펠이나 팬을 올려 조리에 쓰고.

 

 
 
가볍다, 화로대만 따지면 620g, 세트를 다 포함하면 1.06kg이다. 세트는 화로대와 코펠 받침대, 방염포, 케이스로 구성된다. 받침대는 두 개인데 설치 방법에 따라 높이가 달라진다. 방염포는 불똥이 떨어져도 지면에 혹은 바닥의 무언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커다란 숯이 떨어지면 구멍이 난다. 실험해 보다가 구멍 몇 개 뚫렸다. 케이스는 이 세 가지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인데, 원단이 두꺼워서 화로대 특유의 냄새가 밖으로 잘 새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방염포 밑에 두터운 은박 방열포를 하나 더 까는데 그것까지 접어서 넣어도 넉넉하다.
 
소재는 스테인리스 스틸. 티타늄은 아닌데 얇게 가공해서 가볍다. 'MADE IN U.S.A, COUNTRY of ORIGIN JAPAN'이다. 잘 접혀 수납공간도 적다. 납작하게 접혀서 캠핑 박스에 쓱 밀어넣으면 쑥 들어간다. 마음에도 쏙 든다.
 
spec.
크기. 360×230×200mm (폈을 때)
무게. 620g (화로대)
         1,060g (패키지)
 
실용성 관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불을 끈 후 화로대가 빨리 식는다는 거다. 끄고 잠시 후면 들고 재 버리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예전에 뜨거워서 기다려야 했고 무거워서 힘들었는데, 빨리 식고 가벼워서 화로대 정리가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두 개의 받침대가 들어 있는데 높이를 조절할 수 있어 아주 유용하다. 불을 피울 땐 받침대 위에 장작을 얹어 여러 개의 장작에 동시에 불을 붙일 수 있고, 원하는 불의 세기에 따라 4~5cm 정도의 간격을 활용할 수 있다. 받침대는 두 개의 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간격이 7.3cm라서 3인용 모카포트 정도 올라갈 수 있다. 제조사는 트랜지아 알코올 램프를 얹을 수 있는 규격이라 하는데 굳이 알코올스토브를 화로대의 받침대에 끼워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불 앞의 인간. 150만 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를까.

 
 
이 화로대의 가장 큰 미덕은  작은 불도 귀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구조상 길다란 장작을 우물정자가 아닌 같은 방향으로 쌓게 되는데 순식간에 큰 불꽃으로 장작들을 태워버리는 대신 일정한 불꽃을 유지하면서 차근차근 장작을 태운다. 다시 말해 많은 장작을 쌓아 불놀이를 즐기는 대신 두세 개의 장작으로 불의 조곤조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물론 원하면 우물정자로 장작을 쌓을 수 있다. 사람이 많고 장소도 널찍하여 큰 모닥불이 필요하다면 제법 큰 불도 피울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화로대가 지닌 기본적인 방향성이 큰 불이 아니라 작은 불을 유지해 정해진 양의 장작으로 보다 오랜 시간 불을 피울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사방이 막힌 구조와 양쪽이 뚫린 구조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바람이 잘 통한다는 건 일장일단이다. 불이 잔숯 없이 재만 남겨 처리하기 편하지만, 바람이 세면 불티가 날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심해야 한다.
 
사용하면서 알게 된 장점. 판재가 무척이나 얇은데 절개 부위 마무리가 잘 되어 있어 손을 다칠 일이 없다. 구조상 화로대의 다리나 지지대가 운반 시 손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에 판재를 만질 일은 거의 없지만 재를 턴다거나 남은 재를 닦아낼 때 등 판재의 모서리를 잡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섬뜩한 경험은 없었다. 마감에 공을 들였다는 게 곳곳에서 느껴진다.
 
쓰다 보니 알게 된 단점도 있다. 화로대의 판재와 선재가 연결되는 부분을 보면 판재가 선재를 물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무거운 장작을 얹은 채 옮긴 적이 있어서인지 접으면 물림이 빠질 경우가 있다. 펼칠 때 신경을 쓰면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냥 좀 아쉽다.
 
곰 스프레이가 필수품이었던 깊숙한 숲에서 모닥풀을 피우고 하루 종일 걸어 땀에 젖은 옷과 몸을 말리고 요기를 한 후에 불멍을 하다가 든 생각은 170만 년 전 불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과 지금의 내가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였다. 불가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고 사냥에 나섰던 이들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늘 먹던 날고기 대신 불에 익힌 고기를 먹는 호모 에렉투스와 나는 얼마나 다른가. 그때의 기억이 디엔에이에 남아 지금 사람들이 불멍을 즐긴달 순 없지만, 겨우 10년 전과 거의 모든 것이 다른 일상을 생각할 때 '불 앞에 선 인간'이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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