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화 糟糠之火

2023. 5. 6. 08:00캠핑의 물건들

 

코베아, TKB-8712.

 

[불놀이의 물건] 

 

 

나의 첫 스토브. 오래전 캠핑을 시작하면서 산, 나의 20년 지기.

 

정확히 말하면 캠핑을 시작하기 전에 샀다. 캠핑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1박 2일 야외음주를 즐기면서 시작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이 꽉 막히면 산에 오르곤 했는데 그때 등산화를 샀고, 어느 가을 문득 지리산이 가고 싶어 45L 배낭과 스토브, 코펠 등을 산 것으로 기억한다. 2000년 2001년 즈음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다닌 캠핑에서도 주력 스토브로 썼으니 돼지 몇 마리는 이 위에서 사라졌겠다.

 

사진 속 이 녀석은 사실은 20년 지기는 아니다. 그 친구는 15년 정도 써서 헤드에 금이 가 가스가 샜다. 가스가 샌다기보단 화구 아닌 곳에서도 불꽃이 일었다는 말이 맞겠다. 가스야 밸브에서 잠그면 되니까. ‘화력이 세졌겠네’ 하며 무심히 계속 썼다. 그러다 2015년 어느 출장길에 가스 사러 들른 장비점에서 같은 모델을 팔기에 생각할 틈도 없이 집어 들었다.. 내 캠핑의 기록지 같은 스토브였기 때문에 현역으로 꼭 곁에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처음 산 녀석은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무 아쉽다.

 

소개가 늦었다. 코베아의 TKB-8712다. 숫자는 쉽게 짐작하다시피 87년 12월에 데뷔했다는 뜻이다. 코베아 전신 대웅물산의 T, 코베아 K 그리고 버너 B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버너는 화구 부분을 뜻하고 스토브는 연료통을 포함한 전체를 가리킨다. ‘투 버너 스토브’는 화구가 2개인 스토브를 뜻한다. 어쨌거나.

 

35년이 훌쩍 넘으니 꽤 오랜 역사를 가진 모델이지만 작고 가볍고 화력도 센 새로운 모델들이 나오는 동안에도 초기 모델 그대로 아직도 판다. 달라진 부분도 없다. 내부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고 헤드에 음각으로 새겨진 코베아의 로고만 달라졌다. 신형은 지금의 부메랑 로고, 구형은 누가 봐도 30년은 됐음직한 오랜 로고와 서체다.

 

일단 스펙을 살펴보자. 화력 2,011kcal/h. 요즘 나오는 초경량 가스스토브보다 조금 약한 편이다. 하지만 고기를 굽거나 라면을 끓일 때 답답하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레귤레이터가 없고 액출 가스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좀 답답하다. 그래도 뭐 가스 캐니스터(가스통)를(가스통) 데우는 여러 자잘한 노하우들이 많아서 잘 썼다. 예를 들면 손으로 감싸 쥔다든가 핫팩을 바닥에 깐다든가.

 

 

부속들을 떼어내고 깨끗이 닦으니 다른 스토브가 되었다. 미니멀 모드 스토브는 따로 있으니 무게보다 편리함에 맞춘 세팅으로 쓴다.

 

무게는 352g으로 되어 있는데 수납 케이스가 포함된 무게인 모양이다. 케이스는 잃어버렸는데, 스토브만 재니 291.2g이다. 참고로 나는 받침대(93.2g) 점화장치(58.3g)를 떼어냈으니 139.8g짜리 스토브다. 요즘의 가스스토브에 비하면 무거운 편이지만 원래 상태보단 가벼워졌으니 만족한다. 별도의 받침이 필요하지만 여러 용도로 쓰니 괜찮다.

 

이 스토브의 가장 큰 장점은 넓은 화구다. 화구 지름이 850mm. 큰 만큼 무겁겠지만, 코펠에서 열을 받아들이는 면적을 넓힌다. 화구 작고 화력 센 놈들은 고기 구울 때 앞뒤만 뒤집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녀석은 아주 마음에 든다.

 

코펠 받침대 또한 넓은 화구에 맞게 큰데, 보조 받침대를 접어도 123mm, 펼치면 186mm다. 4~5인용 코펠도 모두 가볍게 지지해 주고 가정용으로 쓰이는 프라이팬도 260mm까지 큰 불편 없이 쓸 수 있다. 받침대가 큰 스토브에는 지름이 작은 모카포트를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 녀석은 받침대가 밖에서 오므라드는 형태가 아니라 안에서 뻗어 나가는 형태라 1인용 모카포트도 올릴 수 있다. 그만큼 무게는 더 나가겠지만 여러 용도로 안심하고 쓸 수 있다는 건 꽤 큰 미덕이다.

 

사실 받침대와 점화플러그를 떼어내고 지금의 꼴을 갖춘 건 오래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껏 잘 썼다. 이 녀석한테 기대한 건 멋진 디자인이 아니라 무난한 쓸모였으니까. 어느 날 스토브 헤드에 낀 오염을 닦아내려고 보니 받침대와 점화플러그를 분리해야 제대로 청소할 수 있겠더라.

 

그제서야 스토브의 구조를 찬찬히 보았다. 그전까진 파트로만 받아들였다. 여긴 헤드, 여긴 받침대, 여긴 점화플러그. 파트들이 연결된 구조들을 살피니 거추장스러운 부분들이 보였다. 점화장치와 받침대, 받침대를 받치는 받침대, 그 받침대를 받치는 용수철.

 

청소를 위해 떼어냈지만 떼고 나니 훨씬 보기가 좋다. 무게나 생김새보다 중요한 건 물론 안전이다. 하지만 가스가 캐니스터에서 스토브로 들어가 공기와 섞이고 헤드로 나와 불꽃으로 타오르는 길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여전히 안전한 채 몇 곱절 아름다워졌다. 클래식 느낌이 좀 난다. 그렇다고 현장에서 사리진 않을 거다. 현장에선 거리낌 없이 쓰고 돌아와선 잘 닦아줄 생각이다.

 

2대의 스토브로 20년에 걸쳐 나의 캠핑과 아웃도어를 함께 하고 있으니 조강지화(糟糠之火)라 불러도 되겠다.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어려운 시절을 함께 살아낸 아내를 가리킨다. 아내뿐 아니라 배우자를 뜻할 것이다. 배우자뿐일까. 한겨울 대지에서 올라오는 송곳 같은 추위에 밤새 떨고, 캐니스터를 토치로 지져가며 함께 한 스토브이니 리액터나 초경량 스토브가 있다고 어찌 내치겠는가. 계속 같이 갈 거다. 어쩌면 하나를 더 들여 3대에 걸쳐 이어갈지도 모르겠다. 조강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 남루함이 아니라 남루해도 누구보다 왁자지껄 즐거웠고 유유자적 여유로웠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

 

7시 30분 방향의 홀 없는 부분. 가만 보고 있으면 궁금해서 가려움증이 생길 정도다.

덧.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버너 헤드를 보면 가스가 나오는 홀들이 세 줄로 뚫려있다. 그런데 1cm 정도 구멍이 없는 부분이 있다. 구멍을 내자면 13개 정도 만들 공간인데, 왜 뚫지 않았을까? 아 궁금해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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