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한다는 것

2023. 6. 7. 07:00캠핑의 물건들

스노우피크. 기가파워스토브 GS-100.

[불놀이의 물건]

 

 

 

아마도 나의 두 번째 스토브.

10년 전에 샀고, 이 사진은 아직 불을 붙이기 전, 그러니까 10년 전의 모습이다.

 

10년 전 아웃도어 잡지사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노우피크 본사 취재가 잡혔다. 본사 투어 프로그램이었는데 일반인 참가자들과 함께 본사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야마이 토오루 대표의 배려와 메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건 애프터서비스를 담당하는 이나타 코지 씨였다.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보다가 일하시는 분이 계셔서 들어가도 되는지 여쭙고 허락을 받아 들어갔다. 재봉틀에 앉아 의자와 텐트를 수리하고 있었는데, 묻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 더욱더 좋았다.

 

"제품을 받아보면 고객의 성격과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 의자는 고장 난 곳을 고쳐 쓴 흔적이 있어요. 아끼는 마음이 전달되죠. 고장이 났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저희 제품을 아끼는 마음이 고마워요. 제 마음까지 전달될진 모르겠습니다만, 더 튼튼하게, 새 제품처럼 고쳐서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대표가 대외적으로 전하는 메시지와 평범한 직원이 제품을 대하는 자세가 일치한다는 건 쉽지 않다. '좋은 건 인정, 근데 넘 비쌈'의 브랜드에서 '비싼 건 인정, 근데 가성비 갑'의 브랜드로 인식이 바뀌는 계기였고, 그런 마음으로 만든 기어를 하나 들이고 싶어 1층 샵에서 산 게 이 스토브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써 본 건 처음이었는데, 소문대로 두 번 놀란다. 크기에 한 번, 화력에 또 한 번. 물론 지금은 더 작고 가벼운 스토브도 많고 화력이 센 스토브도 많지만 이 스토브는 데뷔가 1998년이다. 앞서 말한 코베아의 스토브처럼 가스를 연료로 쓰는 스토브라는 이유로 인기를 끌던 시절이다. 두 스토브를 놓고 보면 같은 세대의 산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코베아 스토브를 폄훼하는 게 아니라 스노우피크 스토브가 놀랍단 이야기다. 이 바닥에서 유명한 백패커 BACKPACKER 에디터스 초이스로 선정됐다.

 

데뷔치고는 인상적인 데뷔였다. 아웃도어 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이 이 제품을 보고 "어떤 제품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우리는 축소모델 말고 진짜 제품을 보고 싶다"고 한 건 유명한 이야기다. 연구 개발에 4년이 걸렸다 하는데, 뭔가 이해가 된다.

 

무게는 75그램이다. 50그램 대의 제품들도 있으나 안정감이 아쉬운 반면 이 스토브는 미니멀하되 안정적이다. 크기는 더 놀랍다. 미국 신문에 실린 광고에는 이 스토브가 달걀에 담겨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능한가 궁금해서 해본 적이 있는데 '왕-특-대-중-소'의 서열 중 크기 탑인 왕란에 담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턱 없이는 아니고 좀 아쉬운 정도. 그 시절의 달걀이 유난히 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광고는 나름 설득력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제일 중요한 화력. 바깥 활동에서 뜨끈한 걸 얼마나 빨리 먹을 수 있느냐는 안전과도 연결된다. 시간당 2500킬로칼로리.  이 작은 덩치로 이 작은 화구로 이 정도 화력은 놀랍다. 화력 자체는 그다지 아쉽지 않으나 헤드의 크기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화구가 작아 코펠의 중앙부에 화력이 집중된다. 크기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 와중에 불구멍을 수직으로 만들어 불길이 옆으로 퍼지도록 한 건은 칭찬할 만하다. 가스가 나오는 압력에 의해 불길이 옆으로 퍼져 2~3인용 프라이팬 정도라면 팬을 고루 달군다.

 

쓰다 보니 바람에 약하다는 게 단점이다. 바람을 막아줄 벽이 없으니까. 이 역시도 화구가 수직이기 때문에 불 전체가 날아갈 일은 없다. 한 쪽이 바람을 받으면 반대쪽은 바람이 없을 테니까.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지 스노우피크는 이 스토브에 특화된 바람막이를 출시했다. 스토브 케이스에는 바람막이를 수납할 수 없어 좀 번거롭고 잃어버리기 쉽지만, 효과는 괜찮은 편이다. 사실 백패킹 용도로 나왔으니 바람 맞을 일은 더 많고 이런저런 장비를 챙기기는 더 어렵지만, 어쨌거나 선택할 수 있어 다행이다.

 

스노우피크 로고를 보면 'since 1958'이라 적혀 있다. 1958년 눈이 많아 물 좋고 철 좋은 니가타 지역에서 아이젠과 피켈을 만들던 스노우피크는 창업주 2세인 야마이 토오루가 합류한 1985년부터 캠핑에 관심을 가졌다 한다. 마침 호황을 누리던 일본 경제와 더불어 베이비붐 세대가 가정을 꾸리면서 아이들을 위해 캠핑을 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전후 황폐한 시대를 보낸 이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 주고자 자연을 찾았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잃어버린 10년'. 하필 캠핑을 시작하게 했던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캠핑 열기가 주춤해졌고, 스노우피크 또한 타격을 받았다.

 

새로운 시장 미국은 일본과 달랐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백패킹에 가까웠다. 자연 속으로 가볍게 멀리 떠나 모험을 즐겼다. 작고 가벼운, 동시에 믿을 만한 장비. '달걀 크기의 스토브를 만들자' 목표를 정하고 개발을 시작해 4년 후인 1998년에 미국 시장에 데뷔한 거다.

 

나는 스노우피크의 기가파워 스토브를 보고 있으면 혼다의 슈퍼커브가 떠오른다. 백패킹 천국 미국의 시장을 보고 '달걀 크기의 스토브'를 만들기로 한 스노우피크와 '국수 배달 소년이 한 손으로 운전할 수 있는 바이크'를 개발하기로 한 혼다는 닮았다. '달걀 정도의 크기에 두세 명이 음식을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화력과 안정성을 갖춘 가스스토브'와 '작고 가벼운 차체에 높은 성능을 내는 소배기량 엔진을 얹고 조종성이 좋고 유지보수 비용이 적은 이륜차'는 다른 장르임에도 많은 부분 겹친다.

 

뭘까. 처음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질문. '팔릴까?'가 아니라 '필요한가?'의 차이. 진짜 필요한 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생각했다. 근데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아이디어를 두고 '필요한가?' 물은 게 아니다. '뭐가 필요한가?' 묻고 그 답을 만든 거지. 숟가락 얹어 살짝 보완하는 것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처음부터 시작해 원하는 목표에 다가가는 것.

 

오래전에 들인 가스스토브 하나 오랜만에 물끄러미 바라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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