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세서리처럼 가볍게, 툴박스처럼 든든하게

2023. 7. 21. 18:31캠핑의 물건들

빅토리녹스의 작은 멀티툴과 로비본의 작은 손전등.

[캠핑의 물건]

 

 

칼, 여러 개 있다.

 

아주 날카롭고 칼등이 두터워 큰 힘이 필요할 때 쓰는 헬레도 있고 적당한 힘을 가할 수 있고 가벼워 휴대성도 좋은 오피넬도 있다. 마니아처럼 다양한 라인업을 구축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아웃도어를 즐기면서 칼을 쓰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 나의 용도와 필요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더 가볍고 가지고 다니고 더 가볍게 쓸 수 있는 칼이 필요했다. 택배도 까고, 줄도 자르고, 뜯기 애매한 포장도 뜯고, 사과를 자르거나 치즈를 자르는 등 음식을 작게 나눌 때 같은. 이 정도의 필요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티 나지 않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칼.

 

등이라고 없겠는가.

 

주로 헤드랜턴이긴 하다. 가벼운 산행에 비상용으로 챙기는 헤드랜턴과 장기간의 하이킹에 가지고 가는 헤드랜턴이 있다. 더 무겁지만 더 밝고 오래간다. 머리에 붙는 느낌도 더 견고하고. 말고도, 어딘가에 걸어 주변을 고루 밝히는 등도 있다. 골제로의 등인데 충전식이고 밝기와 배터리 효율 모두 좋아 언제나 챙긴다. 언제나 챙긴단 건 휴대성도 좋다는 뜻이다. 역시나 덜 밝아도 적당히는 밝고 훨씬 작고 가벼운 랜턴이 필요했다. 갑자기 날이 저물었을 때 어두운 산책로를 밝히고,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신호도 보내고, 주차장에서 뭔가를 떨어뜨렸을 때 찾을 때도 유용한. 필요할 땐 그래도 꽤 밝아서 랜턴으로써도 제 역할을 다 하는.

 

그래서 만든 게 이 조합이다. 평소에는 자동차 스마트키 열쇠고리에 끼어 가지고 다니고 자연으로 나갈 땐 사코슈나 배낭의 키홀더에 걸어 언제라도 간단하고 빠르게 꺼내 쓸 수 있도록 준비한다. 홋카이도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이 칼과 등의 조합은 프런트백 키링에 걸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쓸 일은 많지 않았다. 체인이 뒷바퀴 허브에 끼었을 때 미니 랜턴으로 패니어 사이를 비추어 체인이 어디에 어떻게 끼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 맛나다는 홋카이도 우유를 종이팩으로 샀을 때 칼로 꼭지를 뗄 수 있었다. 밤에 화장실을 갈 땐 손가락 크기의 랜턴이 유용했고, 토마토 잘라 후추를 뿌려먹을 땐 저 작은 칼 이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마련하면 먹을 거리와 칼/불 세트를 곁에 두는 게 휴식 시간을 맞이하는 나의 루틴이었다.

 

 

칼이라 했지만 나름 멀티툴이고 마이크로 손전등이지만 꽤 밝다. 그리고 가볍다. 이 조합으로 45그램.

 

빅토리녹스는 칼이 아니라 멀티툴을 만든다. 칼이라 했지만 멀티툴이다. 칼과 가위, 줄이 있다. 줄 끝은 일(-)자 드라이버로 쓸 수 있다. 가위는 주둥이가 작아 쓰는 데 한계가 있지만 절삭력이 좋다. 끄트머리에는 작은 집게와 이쑤시개가 있다. 연마용 줄은 여행 도중에 손톱이 찢어졌을 때 유용했다. 가위로 손톱을 잘라내고 날카로운 부분을 다듬었다. 없었으면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자전거 장갑을 낄 때마다, 패니어에서 물건을 꺼낼 때마다 애를 먹을 뻔했다.

 

하지만 빅토리녹스의 가장 큰 장점은 견고함이다.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아직 시련이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오래전 자취할 때 집 근처 낚시점이 망해 재고를 정리할 때 처음 산 빅토리녹스 멀티툴은 자취방의 공구함 그 자체였다. 모든 조립과 해체는 빅토리녹스 멀티툴의 몫이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다 그런 줄 알았다. 뭐 대단한 기술이라고. 그 뒤 종로에서 산 '짭' 빅토리녹스는 드라이버질 몇 번에 몸체가 벌어졌다. 내가 무슨 금강석에 나사를 박은 것도 아니고... 이 또한 그 정도의 내구성은 있으리라, 믿는다.

 

로비본(Rovyvon)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다. 나도 잘 모른다. 아마존에서 아주 작은 손전등을 찾다가 발견했다. 당연히 크고 훨씬 밝은 손전등도 있고, 나는 내게 필요한 걸 산 것뿐이다. 오로라(Aurora) A3 모델이다. 산 지는 6개월 정도 됐지만 쓸 일이 많지는 않아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만듦새나 쓰임새는 상당히 만족스럽다.

 

가장 만족스러운 건 고무 버튼을 누르면 가장 밝은 조도로 불이 들어온다. 손을 떼면 불이 꺼진다. 누르는 동안만 불이 켜진단 뜻이다. 일상에서 자주 잠깐 쓸 때 가장 필요한 기능이다. 꾹 누르고 있으면 낮은 조도의 불이 켜지고, 이때는 손을 떼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한 번 더 누르면 더 밝게, 더 밝게 그리고 가장 밝게. 그리고 정말 급할 때, 빠르게 점멸하는 스토로브 기능도 있다. 꺼진 상태에서 세 번 빠르게 누르면 된다. 정말 환하고, 정말 빠르게 번쩍인다. 고무 소재 버튼은 보지 않고도 버튼을 찾을 수 있어 편하고, 버튼 외 다른 부분은 모두 알루미늄 합금이라 튼튼하고 아노다이징 처리로 색이 예쁘다.

 

칼과 불은 아웃도어 생활의 가장 기본이다. 물론 불은 빛과 열 모두 중요한 기능이다. 열은 스토브나 화로대의 몫, 랜턴은 빛을 담당한다. 장난감이나 액세서리처럼 보이는 두 기어의 조합이지만, 달리 보면 아웃도어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조합이기도 하다. 아이콘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