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아무런 나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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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꼴 2_여행을 할 거야, 라이딩과 촬영은 거들 뿐
[여행 중입니다] 여행 간담서 '여행을 할 거야'라니. 자전거 탄담서 '자전거는 거들뿐'이라니. 여행을 하면 기록을 한다. 기록은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상관없지만, 익숙한 형태가 글과 사진이다. 이번에는 영상도 재미 삼아 찍어볼 예정이다. 자전거와 모터사이클과 이런저런 여행의 모양새를 간추리는 과정이 있었듯, 여행의 내용도 덜어내는 과정이 있었다. 이를 테면. 탁 트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곧게 뻗은 자전거 길은 섬을 넘어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길.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간혹 멈춰 사진을 찍겠지. 이게 지금까지의 여행 형태다. 영상을 찍으려면 촬영기기를 어딘가에 두고 촬영하며 지나간 후 돌아와 회수를 해야 한다. 이건 여행이 아니다. 하루 80~100킬로미터를 달릴 계획인데, 최고..
2023.06.02 -
여행의 꼴 1_자전거를 탈 거야, 꽃을 볼 거야
[여행 중입니다] 시작은 레분이었다. 홋카이도 북서쪽 끄트머리의 작은 섬. 일단 홋카이도에 가야 한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내리면 레분섬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북쪽 끝의 도시 왓카나이에 가야 한다. 직선거리로 약 295킬로미터, 실제 가는 길로 치면 360킬로미터 정도다. 그래 자전거를 타고 가면 되겠군. 며칠 걸리겠지? 잠은 바다와 밤하늘을 보면서 자겠어. 캠핑을 할 거야. 리시리섬과 레분섬을 충분히 돌아보고 다시 나오면 삿포로를 향해 달리는 거야. 역시 자전거를 말이지. 삿포로에 잡은 숙소에 자전거를 두고 시내 관광을 며칠 하거나 모터사이클을 빌려 자전거로 달렸던 길을 쓱 훑고 오거나 섬의 동쪽 지역을 살펴봐야지. 처음에 생각한 일정은 열흘 정도였다. 모터사이클을 예약하려는데 원했던 혼다 헌터커브가..
2023.06.01 -
여행의 시작_꽃에 이끌려
[여행 중입니다] 레분섬에 갈 거다. 레분섬은 일본의 북쪽, 홋카이도의 서북쪽에 있는 작은 섬이다. 본섬 홋카이도에서 배를 타고 좀 가면 작은 섬 리시리섬에 닿고 거기서 다시 좀 더 가면 레분섬이 나온다. 아주 작은 섬이다. 남북으로 긴데, 긴 쪽이 29킬로미터, 짧은 쪽은 8킬로미터다. 섬 한가운데 솟은 레분산의 높이는 490미터다. 이 사진은 홋카이도 관광진흥기구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가져 왔다. 이 사진은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의 사진이었다. 바다와 꽃이 어우러진. 바다보다 꽃이 많이 보였고, 꽃은 완만하고 푸른 초원에 은하수처럼 피어 있었다. 언젠가 가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레분섬 관광협회에서 소개한 섬의 표어는 '꽃 섬 Flower Island'다. 그게 6월이다. 가겠다고 다짐한 ..
2023.05.29 -
불편함과 두려움이라는 선물
[에세이] 빼곡한 나무 사이, 틈 같은 공간에 텐트를 치고 누워 하늘을 보면 마치 나무로 지은 집에 누운 것 같다. 하루 종일 걸어온 길을 되짚어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지형을 그려본다. 능선이라면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자연에 스며들 듯 깃들어 밤을 맞이한다. 숲은 점점 짙어져 어두워지는 하늘을 닮다가 마침내 완벽한 어둠이 된다. 별이 박힌 곳은 하늘이고, 없는 곳은 숲이다. 하,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 : 도리없이 좋은 캠핑을 하면 뭐가 제일 좋으냐, 물으면 답이 비슷하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먹는 거요. 좋은 경치는 누구나 좋아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일찍이 ‘사바나 가설’을 제시했다. 사바나의 숲은 열대우림보다 채집할 식물과 고기를 얻을 사냥감이 많고 평원이라 오랜 유목에 적합하며 ..
2023.05.06 -
괜찮다는 말_프롤로그
[에세이] 밖으로 도는 일이 내가 해온 일의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집 밖이든, 일상 밖이든. 어느 겨울엔 지리산의 능선을 첫눈과 함께 걸었고 어떤 능선은 달빛에 의지해 걷기도 했다. 한여름의 설악 서북릉을 종주하다가 귀때기청봉 너덜지대에서 탈진해 죽을 뻔한 적도 있다. 해질 무렵 지나던 해남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는 고향과 집 식구들이 떠올라 차를 멈추고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울었던가.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지붕돌의 막새기와에 넋을 잃어 빛이 측면에서 드는 걸 보겠다고 두어 시간 기다리기도 했고 곰배령에서는 얼레지 보겠다고 쭈그리고 앉아 오도카니 있었다. 통영 앞바다에서 카약을 탈 때는 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고 오키나와 서쪽 해안을 자전거로 달릴 땐 고래가 심해를 유영하는 기분이 이렇겠지,..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