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순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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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새를 보려 했으나
[사진 에세이] 며칠 포근하더니. 봄인가 했더니. 내일 자전거를 닦고 조여 타보려 했더니. 눈이 와버렸다. 어제는 비로 눈으로, 수시로 바뀌어 내리더니, 그래도 바닥에는 눈 흔적도 없더니.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며칠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정신이 살짝 떠 있어 하루 쉴까 했는데. 이야기 나누러 지방서 올라온다던 친구도 눈으로 약속을 미뤄 집에서 뒹굴뒹굴 라디오나 들으며 놀까 했는데. 얼마 전 가을 분위기의 논에서 봤던 새 몇 마리가 생각났다. 아니, 실은 눈이 오면 다시 보러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땐 석탄리였고, 다녀와 찾아보니 후평리에 새가 더 많다고 했다. 작업실 가려도 차 돌려 후평리에 갔다. 논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가는데 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도 푸더덕푸더덕 날아가버렸다. 교차..
2024.02.22 -
숲 좋은 시절
[사진 에세이] 오랜 친구들과 공작산 숲을 잠시 걸었다. 산을 올랐다기엔 언저리를 서성였고, "오늘 좀 걸었다"기엔 가벼운 산책이었다. 두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숲으로 난 길을 걷고, 바람이 좋은 곳에서 잠시 쉬었고, 물이 좋은 곳에서 잠시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잠시 쉬었고, 그러다 또 잠시 걷곤 했다. 아주 귀한 나무가 있는 숲은 아니고 그 풍광이 사무칠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 또한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숲이었다. 충분히 좋았다. 하늘은 맑았고 숲은 간간히 볕이 들었다. 숲은 신록에서 벗어나 녹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에 비하면 청년기랄까. 산골짜기에서 간혹 바람이 불었고, 나무들은 저마다의 리듬으로 바람의 박자를 탔다. 바늘잎, 넓은잎, 작은 잎, 큰 잎, 나무 꼭대기..
2023.06.05 -
자본주의의 상상력
[사진 에세이] 자본주의는 욕망을 자극하는 기제라 했던가. 상상은 경험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했던가. 며칠 뉴욕을 돌아보면서 느낀 건 자본주의의 무서움보다 시민사회의 쿨함이었다. 겉핥기 수준이지만 피부에 와닿는 건 자본주의보다 민주주의였달까. 자본주의의 위력을 느낀 건, 현장에서는 타임스퀘어의 거대한 전광판이었다. 물론 돌아와서는 헤매고 다녔던 모든 고층빌딩이 자본주의적 상상과 사고의 결과물이란 걸 깨달았지만. 그건 긴 이야기니 언젠가. 시민사회의 쿨함 혹은 위대함을 느낀 건 모든 뉴요커의 표정을 통해 느껴졌고, 광활한 센트럴파크에선 나도 그 위대함을 만끽했다. 맨해튼 중심의 거대한 공원이라니. 공원, '공공의 정원' 개념을 처음 만든 것이 뉴욕이었고, 센트럴파크였다. 국립공원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것..
2023.06.04 -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사진 에세이] 처음 간 뉴욕, 맨해튼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첫 번째였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색일 땐 주변을 잘 살피고 건넌다. 그냥 건넌다. 금세 적응했다. 며칠 만에 뉴요커처럼 무단횡단을 하려는데 옆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들이 차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멈칫,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경찰도 자연스러웠다. '차가 오면 위험하니 건너지 마란 뜻이야. 지금은 차가 안 오잖아. 도시는 사람이 걸을 수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거지. 두 번째는 무관심.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 피해에는 기분이 나쁜 건 포함되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2023.06.03 -
아라리가 났네
[사진 에세이] 그런 순간이 있다. 낯선 세계를 날 것으로 만나 나의 세계가 변화하는. 변화는 때로 깨지는 것으로 때로는 깊어지는 것으로 또 어떤 때는 낯선 세계로 안내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난다. 겨울이라 봄동을 찾아 떠난 길이었다. 새벽에 진도와 해남을 돌며 일하시는 분들을 버스로 태워 밭으로 오신다 하여 시간을 맞춰 갔다. 아직 도착하시기 전인데, 해가 솟으니 봄동이 꽃처럼 빛나더라. 그 순간만으로도 나의 여행은 이미 충분했다. 그러나. 새벽 꽃잠 베개에 묻어두고 일하러 나온 아낙들은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나이로는 할머니가 맞겠으나 그 입담과 센스, 흥과 발랄함은 아낙이란 말이 맞겠다. 마치 고된 노동을 하러 새벽부터 나온 게 아니라, 새벽에 잠이 깼는데 같이 놀 친구를 찾아 나온 것 같았다. 아침..
2023.06.02 -
그냥 걸었던 시간
[사진 에세이] 걷는 일이 그 자체로 즐겁진 않을 때였다. 걷는 건 목적 혹은 목적지가 있어야 했고, 이동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중요했고, 내 마음보다 걷기 위한 컨디션을 체크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걷는 게 좋다. 걷기 위해서 걷는 거지. 목적지? 정하지 않아도 되고, 정한 들 마땅찮으면 중간에 돌아온들 어떤가. 생각의 전환을 이룬 게 2010년의 제주였다. 저가항공사들이 줄지어 생기면서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오는 게 가능해진 게 저 즈음이었다. 당일로 제주 올레를 걸을 수 있게 된 거지. 거의 매주 제주를 다니며 올레를 걷는 지인을 따라 동행했다. 아마도 16코스를 걸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사진 속 장소는 수산저수지고 항몽유적지도 걸었던 걸로 미루어 16코스가 ..
2023.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