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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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의 든든함과 섬세함
[캠핑의 물건] 밥그릇이다. 국그릇이기도 하고 커피잔이기도 하며 맥주잔이기도 하다. 사실은 물을 끓이거나 달걀을 지져 먹을 수도 있는, 그러니까 초소형 코펠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걱이나 국자로 쓰이기도 한다. 야외에서는 ‘원 기어 멀티 유즈’가 필수니까. 그냥 그릇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바닥에서는 ‘시에라컵’이라고 부른다. 아는 사람 다 아는 존 뮤어 John Muir 선생이 만든 미국의 시에라클럽이 활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생김새와 쓰임새가 기가 막혀 그 뒤로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거의 모든 브랜드에서 시에라컵을 만든다. 서너 개의 모델을 거쳐서 스노우피크의 시에라컵에 안착했다. 없는 시절에 스노우피크가 써보고 싶어 샀는데 지금까지 아주 만족하며 쓰고 있다. 저건 ..
2023.05.08 -
<모든 삶은 흐른다>
[새로 들였습니다] 원제 : Petite Philosophy de La Mer (2022) 지은이 : 로랑스 드빌레르 Laurence Devillairs 기타 : FIKA[피카], 2023.3 바다. 바다는 좋아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여행의 주제로도 좋아하고 그래서 책이나 그림, 음악의 주제로도 좋아한다. 자연이어서 좋고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좋다. 반짝이는 윤슬도 좋고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도 좋고, 멀리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도 좋다. 심해의 파랑, 하늘과는 다른 그 파랑도 좋다. 바다에 대한 책이 눈에 띄면 호감을 가지고 살피다가 내용이 괜찮으면 사서 보는데 묘하게 공통점이 있다. 철학적이다. 철학의 이야기를 바다에 빗..
2023.05.06 -
조강지화 糟糠之火
[불놀이의 물건] 나의 첫 스토브. 오래전 캠핑을 시작하면서 산, 나의 20년 지기. 정확히 말하면 캠핑을 시작하기 전에 샀다. 캠핑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1박 2일 야외음주를 즐기면서 시작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이 꽉 막히면 산에 오르곤 했는데 그때 등산화를 샀고, 어느 가을 문득 지리산이 가고 싶어 45L 배낭과 스토브, 코펠 등을 산 것으로 기억한다. 2000년 2001년 즈음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다닌 캠핑에서도 주력 스토브로 썼으니 돼지 몇 마리는 이 위에서 사라졌겠다. 사진 속 이 녀석은 사실은 20년 지기는 아니다. 그 친구는 15년 정도 써서 헤드에 금이 가 가스가 샜다. 가스가 샌다기보단 화구 아닌 곳에서도 불꽃이 일었다는 말이 맞겠다. 가스야 밸브에서 잠그면 되니까. ‘화력이 세졌..
2023.05.06 -
불편함과 두려움이라는 선물
[에세이] 빼곡한 나무 사이, 틈 같은 공간에 텐트를 치고 누워 하늘을 보면 마치 나무로 지은 집에 누운 것 같다. 하루 종일 걸어온 길을 되짚어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지형을 그려본다. 능선이라면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자연에 스며들 듯 깃들어 밤을 맞이한다. 숲은 점점 짙어져 어두워지는 하늘을 닮다가 마침내 완벽한 어둠이 된다. 별이 박힌 곳은 하늘이고, 없는 곳은 숲이다. 하,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 : 도리없이 좋은 캠핑을 하면 뭐가 제일 좋으냐, 물으면 답이 비슷하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먹는 거요. 좋은 경치는 누구나 좋아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일찍이 ‘사바나 가설’을 제시했다. 사바나의 숲은 열대우림보다 채집할 식물과 고기를 얻을 사냥감이 많고 평원이라 오랜 유목에 적합하며 ..
2023.05.06 -
조금씩 천천히 멈추지 않고
[사진 에세이] 어제 덥더니 지난밤부터 비다. 며칠에 걸쳐 걸을 때 비는 참 난감하다. 걸을 땐 속도가 나지 않고, 쉬어도 몸이 마르지 않으며, 자고 일어나는 일이 겁나게 번거롭다. 그래도 걷다 보면 길 옆 과수원의 익지 않은 사과가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풍경 같은 걸 만난다. 볕도 비도 다 필요한 것이지. 다만 내가 어찌 할 수 없을 뿐. 그러니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익어가는 것이지. 조금씩 천천히, 멈추지 않고.
2023.05.05 -
다시 불멍
[불놀이의 물건] 내게 캠핑의 즐거움을 다시 일깨운, 고마운 화로대다. 언제부턴가 나의 캠핑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많은 짐을 챙겨 옮기고 펼치는 데 힘을 쏟고 하룻밤 보낸 뒤 다시 거두어 정리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계절이 시나브로 바뀌어가는 걸 본다든가, 긴 여행 도중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텐트를 펼치는 것을 생각하다가 떠난 1박 캠핑은 너무 밋밋하고 동시에 너무 성가셨다. 불놀이도 마찬가지. 불멍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화로대를 피울 수 없는 곳이 아니라면 화로대를 펴고 불을 피운다. 오랜 스테디셀러인 역사각뿔 모양의 화로대가 있는데 어지간히 많이 쓰기도 했다. 역사각뿔형 화로대의 원조는 스노우피크지만 내가 가진 건 우연한 경로로 내게 온 코베아의 카피품..
2023.05.05 -
늦봄의 단풍
[사진 에세이] 벌써 덥다. 잠시 봄에 한눈을 파는 사이, 서둘러 온 여름이 뒷덜미를 툭 건드린다. 아... 곧 여름이겠구나. 살갖에 새겨진 찌는 무더위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괜찮아. 곧 가을바람이 그 뒷목을 파고들 텐데 뭐. 저 신록의 단풍잎이 녹음을 지나 붉게 물드는 동안 땀도 흘리고 쉬면서 땀도 식히면서 또 한 번 살아가야지.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