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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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
[잡담] 오랜 시간 글을 써왔다. 읽을 만한, 남길 만한, 간직할 만한 글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잡지사에 다니면서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글을 써야 했으니. 아 그 전에 대학원에서 머리 찍어가며 썼던 글들이 있을 텐데 그건 더 한심하고. 어쨌거나 이런저런 글들을 20년 넘게 써왔는데 남아있는 건 별로 없다. 대학원 시절 글은 플로피 디스켓에 있는데 읽을 장치도 없고, 아마도 에러가 났지 싶다. 잡지 글은 발행 뒤 잊혀졌고, 개인적으로도 파일을 관리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블로그 등에 적었던 글은 지속적으로 운영하지 못해 폐허가 되면서 함께 먼지가 되었다. 아쉽긴 하다. 좋은 글을 간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헤아릴 수 있는 글을 놓쳐서다. 이사를 싫어하지만 이사의 필요성은 간혹 공감한다. 이사나..
2023.05.28 -
젖무덤
[사진 에세이] 앞에 소개한 '빗방울로 쌓은 탑'을 보기 전날 밤, 대릉원. 숙소가 대릉원 앞이었고, 저녁을 먹고 들어와 쉬려다 밤의 대릉원이 궁금하여 카메라만 들고 나갔다. 낮보단 적었지만 사람이 제법 있었고, 인적 없는 고요함을 기대했었기에 한 번 둘러보고 나가려 했다. 낮의 일정이 빡빡했었는지 피곤해서 잠시 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대릉원 문을 닫는 시간이 10시였던가, 그랬는데 한 30분 정도 남았기에 한 바퀴 더 돌고 가려고 일어섰다. 두어 번 정도 모퉁이를 돌았을까. 엄마의 젖가슴 같은 무덤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편안하고 그리고 안전한 엄마의 젖가슴. 어렸을 땐 몰랐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었을 때 얼마나 편안해하고..
2023.05.28 -
빗방울로 쌓은 탑
[사진 에세이] 출장이었지만 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경주에 있는 전통시장을 취해하는 일이었고, 나는 시장도 좋아하고 경주도 좋아한다. 특히 경주의 박물관. 일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고 숙소를 잡아 하루를 더 묵었고, 밤엔 대릉원을 걸었고 이튿날 낮엔 박물관에서 내내 머물렀다. 서너 번을 돌아본 뒤 땀에 젖어 밖에서 탑을 보면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후다닥 건물 안으로 혹은 처마 밑으로 피했고, 나는 가만 있었다. 뛸 기운도 없었고, 이미 땀에 젖은 뒤였다. 사위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뜰에 가득했던 소리들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고, 듣다 보니 젖어가는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빗방울이 쌓아올린 다보탑이 눈에 들어왔다. ..
2023.05.28 -
<슬픈 열대>
[새로 들였습니다] 원제 : Tristes Tropiques (1955) 지은이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 기타 : 한길사, 2022.11. 여행을 다니면서 글을 쓰긴 하지만 수박 껍데기 핥는 느낌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껍데기라도 안쪽이면 좋으련만, 바깥쪽. 뉴욕에서는 서점에서 뉴욕의 역사에 관련된 책을 구하고, 네팔에 다녀와서는 셰르파족에 대한 인류학 논문이 있어서 보기도 했다. 아쉬움은 나름대로 채워졌지만, 그래서 누군가에게 여행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게 얼마나 피상적인 지식인지는 스스로 명확했다. 물론 세계 어느 곳을 여행할지 모르는 마당에 모든 곳의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쌓는단 건 불가능하겠지만, 시선을 조금 다르게 본다면 ..
2023.05.27 -
전쟁과 평화
[사진 에세이] 좀 오래 전, 통영이었다. 좋아서 혹은 일이 있어서 거의 계절에 한 번씩 통영을 찾던 때가 있었다. 한... 몇 년 정도. 산도 보고 바다도 보고, 세병관이 좋아서 하릴없이 거닐며 머물러도 보고 중앙시장의 번잡함이 좋아 회 떠주시는 할머니들과 수다도 떨고. 아마도 일로 갔을 때다. 여행기이니 여행을 하면 되지만, 대개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사항이 있기 마련이어서 돌아보는 곳이 정해져 있다. 가야할 곳을 다 본 다음에 아무런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통영운하 근처였나 힘들어서 잠깐 쉬는데 볕 좋은 곳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풍경이 좋다고 이방인이 개입하면 전투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법, 멀찌감치에서 풍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몇 장 찍었다. 장기를 잘 몰라 어느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
2023.05.27 -
다시 자전거
[사진 에세이] 다시 자전거를 탄다. 지난해였나, 몸이 안 좋아서 쉬었다가 추석 무렵에 한 번 두어 시간 탔는데 다시 탈이 났다. 올해는 봄에 아내 자전거 연습 시킨다고 아파트 공터에서 잠깐 앉은 게 전부다. 문득, 몇 해 전 오키나와에서 캠핑 짐 싣고 자전거 여행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참 자유로웠는데. 한 마리 고래가 된 것 같았는데. 이런저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무작정 갔었는데. 그래도 좋았는데. 다시 자전거를 탄다. 글쎄. 또 탈이 날 수도 있겠지. 그럼 또 쉬었다가 우선해지면 또 타는 거지. 이전보다 좀더 두렵지만 안 타기엔 그 좋았던 느낌이 생생하고 아깝다. 무리하진 말자, 싶어 30km 코스를 다녀왔다. 평속 20km/h 조금 못 되는 것 같은데, 탈 만하다. 안장통은 생각보다 좀 있고. 그..
2023.05.25 -
캠핑에 제일 잘 어울리는 커피
[커피의 물건] 캠핑하면서 마시는 커피 한 잔, 참기 어렵지. 커피를 좋아한다.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한 건 대략 10년 전이고, 캠핑을 하면서 커피를 내려마신 건 5~6년 전부터다. 처음엔 양을 조절하지 못해 드립커피가 에스프레소보다 진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 잡향이 섞인다는 걸 몰라 10분 가까이 내리기도 했다. 무슨 드립을 10분 넘게 내리냐고? 1인용 드립 시스템인 카플라노에 원두를 30그램 가까이 넣으면 물을 조금만 부어도 넘쳐서 거의 점드립을 해야 한다. 어쨌거나. 집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모카포트를 구했다. 오래전 일이다. 제일 잘 알려진 건 비알레띠BIALETTI의 모카포트인데, 처음엔 그것도 몰라 그냥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걸 샀다. 그게 임페리아IMPERIA 모카포트..
2023.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