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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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걸었던 시간
[사진 에세이] 걷는 일이 그 자체로 즐겁진 않을 때였다. 걷는 건 목적 혹은 목적지가 있어야 했고, 이동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지나온 거리와 남은 거리가 중요했고, 내 마음보다 걷기 위한 컨디션을 체크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걷는 게 좋다. 걷기 위해서 걷는 거지. 목적지? 정하지 않아도 되고, 정한 들 마땅찮으면 중간에 돌아온들 어떤가. 생각의 전환을 이룬 게 2010년의 제주였다. 저가항공사들이 줄지어 생기면서 새벽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오는 게 가능해진 게 저 즈음이었다. 당일로 제주 올레를 걸을 수 있게 된 거지. 거의 매주 제주를 다니며 올레를 걷는 지인을 따라 동행했다. 아마도 16코스를 걸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사진 속 장소는 수산저수지고 항몽유적지도 걸었던 걸로 미루어 16코스가 ..
2023.06.01 -
여행의 꼴 1_자전거를 탈 거야, 꽃을 볼 거야
[여행 중입니다] 시작은 레분이었다. 홋카이도 북서쪽 끄트머리의 작은 섬. 일단 홋카이도에 가야 한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내리면 레분섬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북쪽 끝의 도시 왓카나이에 가야 한다. 직선거리로 약 295킬로미터, 실제 가는 길로 치면 360킬로미터 정도다. 그래 자전거를 타고 가면 되겠군. 며칠 걸리겠지? 잠은 바다와 밤하늘을 보면서 자겠어. 캠핑을 할 거야. 리시리섬과 레분섬을 충분히 돌아보고 다시 나오면 삿포로를 향해 달리는 거야. 역시 자전거를 말이지. 삿포로에 잡은 숙소에 자전거를 두고 시내 관광을 며칠 하거나 모터사이클을 빌려 자전거로 달렸던 길을 쓱 훑고 오거나 섬의 동쪽 지역을 살펴봐야지. 처음에 생각한 일정은 열흘 정도였다. 모터사이클을 예약하려는데 원했던 혼다 헌터커브가..
2023.06.01 -
새벽의 녹차밭
[사진 에세이] 보성 차밭은 처음이었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면서도 굳이 찾지 않은 건 이미 수많은 사진과 드라마를 통해 봤기 때문이다. 잘 가꿔진 정원 같았다. 생각을 바꾼 건 차밭을 찾은 누군가가 찍은 삼나무 숲길 사진. 녹음 짙은 잘 다져진 흙길을 가장 좋아하는 까닭에 그 이미지를 보는 순간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른 새벽 녹차밭에 드니 왜 이제야 왔나 싶다. 차밭에는 차만 있는 게 아니다. 차밭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 녹차밭이 자리한 활성산과 멀리 보이는 봉화산 줄기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한 안개가 허공에 뜬 풍경은 예쁘단 말에는 담기지 않는 풍취를 지녔다. 근경과 원경의 조화가 일품이다. 그 뒤로 보이는 하늘. 하늘의 짙은 파란색이 점점 하늘색으로 변하면서 어느 순간 도로변의 노오란 가로등이..
2023.05.31 -
告. 내용은 대략 이렇게 나뉩니다
[알립니다] 복잡하게 이런저런 카테고리 있는 게 너무나도 싫어서 뭉치고 합쳐 최소한의 분류만 했습니다. 글이든 사진이든,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 포스팅이 많지 않은 까닭에 한 카테고리 안에 이런저런 내용들이 섞인 느낌입니다. 하부 카테고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포스팅 맨 밑에 있는 태그를 이용하시면 쉽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포스팅은 크게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뉩니다. 메뉴에 있는 카테고리죠. ■ 여행의 아무런 나날 ■ 캠핑의 물건들 ■ 그리고 책 ■ 여행의 순간 내용은 쉽게 짐작하시리라 생각하고, 그게 맞을 겁니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 캠핑 장비 리뷰, 책 이야기, 여행 사진과 짧은 글... 대략 이런 ..
2023.05.30 -
짜디짠 인생
[사진 에세이] "굴 한 점 잡솨볼 텨?" 겨울이면 굴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떠올리는 편이다. 여행지를 찾다가 굴 캐는 걸 보고 싶었다. 남해의 크고 하얀 양식 굴 말고, 서해의 작고 노리끼리한 자연산 굴. 자연산이라서가 아니라 노동이 더 고될 것이라서. 몰랐다. 그리 새벽에 나가시는 줄. 간 날 점심으로 굴국밥을 먹고 식당 주인께 여쭈니 새벽에 나가셔서 아침이면 들어오신다고. 피곤하지만 물때가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서산에서 멀지 않은 전주집으로 갔다.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새벽에 가야 하니 소리가 나도 신경 쓰지 마시라 했다. 전화기 알람이 울려 깨니 부엌이 환하다. 새벽부터 일하시는 할머니들 만나는데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라고. 보온병에 마죽이 한가득이다.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짙푸른 어둠 속에서..
2023.05.30 -
<요리 본능>
[새로 들였습니다] CATCHING FIRE ; How cooking made us human 지은이 : 리처드 랭험 Richard Wrangham 기타 : BASIC BOOKS, 2009 캠핑 장비들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스토브다. 정확하게는 불의 열을 다루는 장비. 스토브, 화로대가 메인이고 불의 빛을 다루는 랜턴이나 불을 만들기 위한 도끼 등이 서브 아이템일 거다. 핵심적인 장비이면서 기계적인 발전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캠핑의 물건들 가운데 가장 '장비'라 할 만한 게 스토브이기도 하고. 불은 무엇보다 요리를 위한 장비다. 캠핑이 야외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라 했을 때 '식'을 담당하는 장비다. 어둠을 밝히는 건 랜턴이 한다 쳐도, 몸을 말리거나 데우는 건 불의 몫이다. 몸을..
2023.05.30 -
여행의 시작_꽃에 이끌려
[여행 중입니다] 레분섬에 갈 거다. 레분섬은 일본의 북쪽, 홋카이도의 서북쪽에 있는 작은 섬이다. 본섬 홋카이도에서 배를 타고 좀 가면 작은 섬 리시리섬에 닿고 거기서 다시 좀 더 가면 레분섬이 나온다. 아주 작은 섬이다. 남북으로 긴데, 긴 쪽이 29킬로미터, 짧은 쪽은 8킬로미터다. 섬 한가운데 솟은 레분산의 높이는 490미터다. 이 사진은 홋카이도 관광진흥기구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가져 왔다. 이 사진은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의 사진이었다. 바다와 꽃이 어우러진. 바다보다 꽃이 많이 보였고, 꽃은 완만하고 푸른 초원에 은하수처럼 피어 있었다. 언젠가 가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레분섬 관광협회에서 소개한 섬의 표어는 '꽃 섬 Flower Island'다. 그게 6월이다. 가겠다고 다짐한 ..
2023.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