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7)
-
조강지화 糟糠之火
[불놀이의 물건] 나의 첫 스토브. 오래전 캠핑을 시작하면서 산, 나의 20년 지기. 정확히 말하면 캠핑을 시작하기 전에 샀다. 캠핑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1박 2일 야외음주를 즐기면서 시작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이 꽉 막히면 산에 오르곤 했는데 그때 등산화를 샀고, 어느 가을 문득 지리산이 가고 싶어 45L 배낭과 스토브, 코펠 등을 산 것으로 기억한다. 2000년 2001년 즈음의 이야기다. 친구들과 다닌 캠핑에서도 주력 스토브로 썼으니 돼지 몇 마리는 이 위에서 사라졌겠다. 사진 속 이 녀석은 사실은 20년 지기는 아니다. 그 친구는 15년 정도 써서 헤드에 금이 가 가스가 샜다. 가스가 샌다기보단 화구 아닌 곳에서도 불꽃이 일었다는 말이 맞겠다. 가스야 밸브에서 잠그면 되니까. ‘화력이 세졌..
2023.05.06 -
불편함과 두려움이라는 선물
[에세이] 빼곡한 나무 사이, 틈 같은 공간에 텐트를 치고 누워 하늘을 보면 마치 나무로 지은 집에 누운 것 같다. 하루 종일 걸어온 길을 되짚어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지형을 그려본다. 능선이라면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자연에 스며들 듯 깃들어 밤을 맞이한다. 숲은 점점 짙어져 어두워지는 하늘을 닮다가 마침내 완벽한 어둠이 된다. 별이 박힌 곳은 하늘이고, 없는 곳은 숲이다. 하,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 : 도리없이 좋은 캠핑을 하면 뭐가 제일 좋으냐, 물으면 답이 비슷하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먹는 거요. 좋은 경치는 누구나 좋아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일찍이 ‘사바나 가설’을 제시했다. 사바나의 숲은 열대우림보다 채집할 식물과 고기를 얻을 사냥감이 많고 평원이라 오랜 유목에 적합하며 ..
2023.05.06 -
조금씩 천천히 멈추지 않고
[사진 에세이] 어제 덥더니 지난밤부터 비다. 며칠에 걸쳐 걸을 때 비는 참 난감하다. 걸을 땐 속도가 나지 않고, 쉬어도 몸이 마르지 않으며, 자고 일어나는 일이 겁나게 번거롭다. 그래도 걷다 보면 길 옆 과수원의 익지 않은 사과가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풍경 같은 걸 만난다. 볕도 비도 다 필요한 것이지. 다만 내가 어찌 할 수 없을 뿐. 그러니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익어가는 것이지. 조금씩 천천히, 멈추지 않고.
2023.05.05 -
다시 불멍
[불놀이의 물건] 내게 캠핑의 즐거움을 다시 일깨운, 고마운 화로대다. 언제부턴가 나의 캠핑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많은 짐을 챙겨 옮기고 펼치는 데 힘을 쏟고 하룻밤 보낸 뒤 다시 거두어 정리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계절이 시나브로 바뀌어가는 걸 본다든가, 긴 여행 도중에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텐트를 펼치는 것을 생각하다가 떠난 1박 캠핑은 너무 밋밋하고 동시에 너무 성가셨다. 불놀이도 마찬가지. 불멍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화로대를 피울 수 없는 곳이 아니라면 화로대를 펴고 불을 피운다. 오랜 스테디셀러인 역사각뿔 모양의 화로대가 있는데 어지간히 많이 쓰기도 했다. 역사각뿔형 화로대의 원조는 스노우피크지만 내가 가진 건 우연한 경로로 내게 온 코베아의 카피품..
2023.05.05 -
늦봄의 단풍
[사진 에세이] 벌써 덥다. 잠시 봄에 한눈을 파는 사이, 서둘러 온 여름이 뒷덜미를 툭 건드린다. 아... 곧 여름이겠구나. 살갖에 새겨진 찌는 무더위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괜찮아. 곧 가을바람이 그 뒷목을 파고들 텐데 뭐. 저 신록의 단풍잎이 녹음을 지나 붉게 물드는 동안 땀도 흘리고 쉬면서 땀도 식히면서 또 한 번 살아가야지.
2023.05.04 -
告.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는 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칼레이도스코프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여행 이야기입니다. 어디쯤 여행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어떤 여행을 그리고 있나요.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재미가 됐든 의미가 됐든, 뭔가 마음이 동하는 게 있기 마련이죠. 때론 잊기도 때론 애써 외면하기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어떤 이는 끝내 자기만의 방식을 향해 나아가고 어떤 이는 또 끝내 일상 안에 머물기도 합니다. 어떤 삶이든 존중하고 존경하며 응원합니다. 저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지금껏 이런저런 여행의 우연한 순간과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떠날 모든 여행의 흥분되고 좌절하고 적응할 어떤 경..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