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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디짠 인생
[사진 에세이] "굴 한 점 잡솨볼 텨?" 겨울이면 굴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떠올리는 편이다. 여행지를 찾다가 굴 캐는 걸 보고 싶었다. 남해의 크고 하얀 양식 굴 말고, 서해의 작고 노리끼리한 자연산 굴. 자연산이라서가 아니라 노동이 더 고될 것이라서. 몰랐다. 그리 새벽에 나가시는 줄. 간 날 점심으로 굴국밥을 먹고 식당 주인께 여쭈니 새벽에 나가셔서 아침이면 들어오신다고. 피곤하지만 물때가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서산에서 멀지 않은 전주집으로 갔다.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새벽에 가야 하니 소리가 나도 신경 쓰지 마시라 했다. 전화기 알람이 울려 깨니 부엌이 환하다. 새벽부터 일하시는 할머니들 만나는데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라고. 보온병에 마죽이 한가득이다.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짙푸른 어둠 속에서..
2023.05.30 -
<요리 본능>
[새로 들였습니다] CATCHING FIRE ; How cooking made us human 지은이 : 리처드 랭험 Richard Wrangham 기타 : BASIC BOOKS, 2009 캠핑 장비들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스토브다. 정확하게는 불의 열을 다루는 장비. 스토브, 화로대가 메인이고 불의 빛을 다루는 랜턴이나 불을 만들기 위한 도끼 등이 서브 아이템일 거다. 핵심적인 장비이면서 기계적인 발전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캠핑의 물건들 가운데 가장 '장비'라 할 만한 게 스토브이기도 하고. 불은 무엇보다 요리를 위한 장비다. 캠핑이 야외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라 했을 때 '식'을 담당하는 장비다. 어둠을 밝히는 건 랜턴이 한다 쳐도, 몸을 말리거나 데우는 건 불의 몫이다. 몸을..
2023.05.30 -
여행의 시작_꽃에 이끌려
[여행 중입니다] 레분섬에 갈 거다. 레분섬은 일본의 북쪽, 홋카이도의 서북쪽에 있는 작은 섬이다. 본섬 홋카이도에서 배를 타고 좀 가면 작은 섬 리시리섬에 닿고 거기서 다시 좀 더 가면 레분섬이 나온다. 아주 작은 섬이다. 남북으로 긴데, 긴 쪽이 29킬로미터, 짧은 쪽은 8킬로미터다. 섬 한가운데 솟은 레분산의 높이는 490미터다. 이 사진은 홋카이도 관광진흥기구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가져 왔다. 이 사진은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의 사진이었다. 바다와 꽃이 어우러진. 바다보다 꽃이 많이 보였고, 꽃은 완만하고 푸른 초원에 은하수처럼 피어 있었다. 언젠가 가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레분섬 관광협회에서 소개한 섬의 표어는 '꽃 섬 Flower Island'다. 그게 6월이다. 가겠다고 다짐한 ..
2023.05.29 -
다시 시작
[잡담] 오랜 시간 글을 써왔다. 읽을 만한, 남길 만한, 간직할 만한 글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잡지사에 다니면서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글을 써야 했으니. 아 그 전에 대학원에서 머리 찍어가며 썼던 글들이 있을 텐데 그건 더 한심하고. 어쨌거나 이런저런 글들을 20년 넘게 써왔는데 남아있는 건 별로 없다. 대학원 시절 글은 플로피 디스켓에 있는데 읽을 장치도 없고, 아마도 에러가 났지 싶다. 잡지 글은 발행 뒤 잊혀졌고, 개인적으로도 파일을 관리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블로그 등에 적었던 글은 지속적으로 운영하지 못해 폐허가 되면서 함께 먼지가 되었다. 아쉽긴 하다. 좋은 글을 간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헤아릴 수 있는 글을 놓쳐서다. 이사를 싫어하지만 이사의 필요성은 간혹 공감한다. 이사나..
2023.05.28 -
젖무덤
[사진 에세이] 앞에 소개한 '빗방울로 쌓은 탑'을 보기 전날 밤, 대릉원. 숙소가 대릉원 앞이었고, 저녁을 먹고 들어와 쉬려다 밤의 대릉원이 궁금하여 카메라만 들고 나갔다. 낮보단 적었지만 사람이 제법 있었고, 인적 없는 고요함을 기대했었기에 한 번 둘러보고 나가려 했다. 낮의 일정이 빡빡했었는지 피곤해서 잠시 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대릉원 문을 닫는 시간이 10시였던가, 그랬는데 한 30분 정도 남았기에 한 바퀴 더 돌고 가려고 일어섰다. 두어 번 정도 모퉁이를 돌았을까. 엄마의 젖가슴 같은 무덤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편안하고 그리고 안전한 엄마의 젖가슴. 어렸을 땐 몰랐다가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기었을 때 얼마나 편안해하고..
2023.05.28 -
빗방울로 쌓은 탑
[사진 에세이] 출장이었지만 여행 가는 기분이었다. 경주에 있는 전통시장을 취해하는 일이었고, 나는 시장도 좋아하고 경주도 좋아한다. 특히 경주의 박물관. 일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고 숙소를 잡아 하루를 더 묵었고, 밤엔 대릉원을 걸었고 이튿날 낮엔 박물관에서 내내 머물렀다. 서너 번을 돌아본 뒤 땀에 젖어 밖에서 탑을 보면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투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후다닥 건물 안으로 혹은 처마 밑으로 피했고, 나는 가만 있었다. 뛸 기운도 없었고, 이미 땀에 젖은 뒤였다. 사위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뜰에 가득했던 소리들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고, 듣다 보니 젖어가는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빗방울이 쌓아올린 다보탑이 눈에 들어왔다. ..
2023.05.28